올려다보지 않아도 파란 하늘 한가운데엔 하얀 해가 둥실 떠서 벙긋벙긋 웃고 있을 것이었다. 이곳에 나온 후 저것이 몇 번이나 희미하게 보이는 저쪽 산밑에서 떠올라 바다가 있는 곳으로 떨어져 갔는지 손가락을 꼽으며 헤아린다는 것은 군대의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그냥 따라주기만 하면 되는 사병급 매복대의 사령관이기도 한 하사 분대장과 상병인 나 그리고 다른 전우들에게 있어 불필요한 일이기도 하였거니와 기후와 계절의 변화가 체감적으로 거의 느껴지지 않는 南國에서는 그다지 익숙치 않은 일이었다. 다만 한 달에 한번씩 기합이 바짝 들은 보급물(신병 배속자)과 수다쟁이 영감탱이가 다 된 귀국자가 중대에 전입되고 전출될 때 되어서야 무덤덤한 시간이 남국의 하늘 아래에서도 그래도 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겨우 실감할 뿐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몸체가 날씬한 미군 폭격기 편대가 날아와 은빛 날개를 번쩍이며 숲 저쪽에 네이팜탄을 떨어뜨리고 재수가 좋으면 단발머리 소녀가 보낸 위문편지를 시누크 헬기 給水 수송편에 받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임무교대가 있을 예정이던 그날 아침 중대본부 화기장으로부터 재매복 전통을 받고 새벽같이 꾸려논 무장을 투털거리며 풀어야 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권태와 고적감을 잊으려고 쉴새없이 잡담을 하는가 하면 날아가는 멧새의 뒷다리를 보고 푸석푸석한 웃음을 객적게 흘리는 친구도 있었다. 눈을 감고도 위로 약간 들린 코라든가 탄력감이 충만한 젖가슴이며 허벅다리에 굼실거리는 보이지 않는 율동을 세세히 그려낼 수 있지만 흙이 묻어 더러워지고 귀퉁이가 이곳저곳 떨어져 나간 잡지의 어느 장에서 한쪽 다리를 약간 꼬고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여인의 나상을 찾아서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겨갔다.

"십칠팔 세쯤 되는 기집애가 눈에 띄지 않겠어. 한 참 어정거리더니 뭐 켕기는 데가 있는지 으슥한 자리에 앉더란 말이야 . 오늘밤은, 딱 계산을 하고 나서 모른 척 다가가 앉았지. 기집애가 힐끗 쳐다보더군. 가만히 눈치를 보니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어. 그다지 맘에 드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여하?그날 밤만 심심치 않게 보내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쌍판 같은 것에 구태여 신경을 쓸 필욘 전혀 없었던 거지."

동감이란 듯이 웃음소리가 키득키득 터져 나왔다. 낮게 비행하는 제너럴보드의 편대가 머리 위로 굉음을 울리며 요란스럽게 날아갔다. 옆으로 삐져 나온 기관총의 총열이 아련하게 보였다.

"기집애가 자리를 비운 틈에 준비해둔 최음제를 탔단 말야. 그것은 앙고라 토끼의 교미용이었는데 언제나 효과가 백퍼센트였거든."

월남 청룡부대 대대본부에 처음 전입되었을 때 본부 연병장에서 군악병이 부는 트럼펫 선율을 타고 연합군 국기(미.월.한)가 남국의 열풍에 펄럭이며 서서히 게양되고 있을 때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하게 느껴지던 자유오ㅓㅏ 평화의 이념은 야간 근무 때 악착스레 달려드는 모기떼와 연일 모닥불처럼 이글거리는 태양볕의 위세에 눌려 열대림 저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 빠진 만도칼로 이름 모를 나무들과 가시덤불을 잘라 가며 산악 탐색을 할 때 한때 젊은 가슴을 후끈 달구었던 그러한 이념들은 군화에 밟히는 풀잎 위에서 혹은 열기에 달아 오른 소총의 검은 덮개에서 손짓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무덩굴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重武裝에 휘청거리는 몸을 끌고 하늘이 작은 종잇장처럼 내다보이는 울창한 잡목숲을 헤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무사히 본대로 귀환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그 자식도 계집애라면 나만치나 사족을 못쓰는 놈인데 개네 집에서 그 기집애를 만났지 머야. 시치밀 뚝 떼고 녀석한테 물었더니 며칠 전에 들어온 식모애라고 하는 거야 글쎄. 그러면서 그 자식 한다는 말이 들어오던 그날 저녁 바로 쇼브를 봤는데 예상외로 아다리가 잘 맞아 들어가더라는 거야. 나 참 기가막혀서."

이야기를 끝내자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허리를 뒤틀며 커다랗게 웃어댔다. 그의 카랑카랑한 웃음소리가 바나나 나뭇잎에 부딪쳐 스산하게 귓바퀴로 몰려 들어왔다. 우리 모두는 이야기할 때 그의 입에서 튀겨지는 침의 정도라든가 웃을 때면 거의 보이지 않는 그이 작은 눈이라든가 다음 이야기의 대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런데 신경을 쓰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무료한 시간이 그냥저냥 지나가 주길 다 같이 바랄 뿐이었으니까.

진해 해병훈련소에서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열중 쉬어엇, 차려어엇.'

당직소대장의 기압 든 구령이 날카롭게 떨어지자마자 소대 전원은 한겨울 얼어붙은 동태 모양의 부동자세로 들어갔다. 총의 윗덮개를 잡은 손아귀에 땀이 촉촉히 배어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총열 끝부분에 단단히 결합되어 있던 M1 소총 개스통 마개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여하튼 재수 옴붙은 날이었다. 숨을 하나같이 머금은 채 장승처럼 서있는 대열 앞을 그저 뚜벅뚜벅 지나치던 대대장이 하필이면 내 앞에 오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쏘아볼 것이 뭐였담.

"귀관"

"네 훈병 xxx"

그는 내가 하고 있는 앞에총을 매가 병아리를 채가 듯이 가져가 병기 손질 여부를 점검하다 부속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총을 당직소대장에게 건네주었다. 대대장은 어깨를 한번 으쓱 치켜올리더니 휘하 참모들을 거느리고 잰걸음으로 병사를 빠져나갔다.

결국 우리 소대는 대대장 점검 대불량을 받았고 나는 독이 한껏 오른 소대장의 무서운 배팅에 뻗어버리고 말았다. 뒤통수 위로 휙 빼 올려진 것이 유연히 내려오다가는 중간쯤 와서 갑자기 빨라져서 그것이 엉덩이의 밑살을 윗쪽으로 후려칠 때 와 닿는 가속도의 힘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뒤늦게야 도둑질의 걸음마 수준인 그런 행위가 아무 거리낌없이 훈병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대 전까지 엄마 품에서 세상 험한 줄 모르고 온실의 꽃처럼 자라난 내겐 그런 일들이 그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거친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기본기라는 사실을 점차 터득하게 되면서 급속히 어른으로 변모해가는 자신을 서글프게 느껴야 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바나나 잎 사이로 비쳐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볼을 살짝 스치며 지나갔다. 갑자기 솟아오르는 젊음과 상쾌함이 전신에 흘러내렸다. 문득 배가 고파왔다. C ration 박스를 열어 햄과 복숭아를 재빨리 먹어 치우고 커피를 끓여 뜨겁고 구수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온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감미로움을 즐기며 한동안 홀짝거리며 마셨다. 조각조각 떠 있는 새털구름이 연주황 빛으로 물들어갔다. 노리쇠에 기름을 쳐주고 그것을 후퇴시켜 꼬질대에 작은 헝겊을 끼워 팔이 후들거릴 때까지 총구를 쑤시고는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얀 광채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번쩍이며 맴돌았다. 약간 느슨한 개스통마개를 분해구로 세게 조였다. 주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침구와 예비실탄, 로켓포 등을 차근차근 무장에 달아맸다.

이미 작전고참이 되어있는 나는 오래 전부터 11번 매복지에서 벌어질 그들과의 필살의 一戰을 망상처럼 머리에 이따금 떠올리곤 했다. 그들은 아직까지 정면으로 공격해오지 않았지만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전방 10여 미터도 잘 보이지 않는 칠흙 같은 밤에 우리의 화력과 방어선을 꿰뚫고 있는 그들이 집중적인 빠른 공격을 시도한다면 우리 모두는 죽음을 각오하고 奮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확연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우리 중대가 위치한 방향으로 1 km 떨어진 곳에 작은 강을 따라 정부군 일개 중대가 주둔하기 시작했지만 막상 일촉즉발의 위기 때 그들이 우리에게 신속한 지원부대를 보낸다든지 하는 작전상의 협조가 원활히 이루어질지는 전혀 미지수였다.

대대본부에서 야전 중대로 전입온 지 이틀 후 처음으로 도로 브라킹(blocking)을 나갔을 때는 다낭 항구쪽에서 시작하여 우리 중대를 지나 정부군 대대본부까지 이어지는 도로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우리 중대를 한참 지난 지점에서부터 멀리 항구 도시 다낭으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미군대대까지 도로를 내기위해 여러 대의 트랙터가 도로가의 숲을 밀어내고 있었다. 적들이 매설한 대전차 지뢰에 조각난 트랙터의 잔해가 새빨갛게 녹이 슬어 갈대 사이에 드문드문 누워 있는 것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임무는 두간에 미군 공병대와 차량을 적의 기습으로부터 보호하고 야간을 틈타 대전차지뢰를 매설하는 그들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빠른 시간 안에 지상 지원부대 병력의 투입이나 공중작전 지원이 원활한 주간에는 그것이 그다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개 소대병력을 조금씩 분산시켜 시계가 얼마 미치지 못하는 야간에 긴 구간을 적의 지뢰매설 공작으로부터 막아내는 것은 사실상 힘겨운 일이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의 매복작전은 날마다 변함없이 실시되었고 미군 공병들은 노랑 머리에 뿌연 흙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써가며 멀지 않은 고지에서 흙을 파다가 도로를 구축해 나갔다.

달이 이지러지기만 하면 어디서 쏘는 지도 모르는 포탄이 곳곳에 떨어져 내렸다. 포탄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살 수 있다는 교육을 받은 바가 있지만 사실 포탄이 악마의 괴성을 지르며 머리 위를 날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인근에 떨어져 내릴 때의 공포감이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둠을 타고 매복대 사이 사이를 다람쥐처럼 요리조리 빠져 다니며 각종 지뢰를 매설했다. 도로 정찰대가 원형 통 모양으로 조작된 폭풍지뢰를 깔아 놓은 돌 틈바구니에서 이따금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재수가 좋은 날에 한해서였다.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도 적지 않은 차량이 부서져 나갔고 급히 날아온 매드백(병원헬기)에 불도저맨(bulldozer man)이 후송되곤 하였다. 중대에 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무심히 도로 정찰대를 따라 나섰다가 불과 10여 미터 앞에서 앞서가던 불도저가 거대한 굉음을 울리며 순간적으로 폭발한 대전차지뢰에 의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전후좌우 가릴 것 없이 하느님 제발 날 살려주쇼, 하며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무적해병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긴 적이 있었다. 간밤에 그네들이 침투했음직한 통로나 예상 진입로에 특수매복조가 은밀히 투입되었지만 그들이 매설해놓은 발목지뢰에 아군의 희생이 있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던가 아님 다음날 아침 낯선 땅에서 쓸데없는 고생하지 말고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한글로 써진 그네들의 설교문이나 주워 읽는 것이 고작일 따름이었다.

도톰해진 벼 이삭이 연초록색을 벗어나 끝부분이 노랗게 물들어 갈 때 즈음 많은 비용과 차량의 손실, 아군의 희생 지불하고 황야를 가로질러 다낭 항구로 이어지는 4번 도로는 월맹의 수도 하노이로 치닫는

1번 공로와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휘어져 뻗어 나가는가 하면 휘어져 꿈틀거리면서 포연에 찌든 남국의 황야를 빠져 나갔다. 자국을 디딜 때마다 탄력이 정글화의 밑창을 튀기면서 발바닥까지 스며 들었다. 이름 모를 남국의 새떼들이 도로에 모여 앉아 꽁지를 쫑긋거리고 종종걸음 치며 노닐다가 후르르 날아가곤 했다. 크고 작은 차량들이 열풍을 가르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수평선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들의 끈질긴 방해공작은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주야간 가릴 것 없이 주민들과 자연스레 도로를 거닐다가 인적이 뜸한 틈을 타서 도로를 순식간에 파헤쳐 지뢰를 매설해 무심코 지나는 차량을 폭파시켰다. 그런 일이 빈발하자 더욱 강화된 도로 정찰과 민간인의 출입 통제 등으로 사고를 다소나마 줄일 수 있었지만 그들이 또 다른 불씨를 그런 곳에 뿌릴 줄은 어느 누가 예상했으랴.

도로를 가로 질러 흐르는 작은 내가 있다던가 특히 11월부터 시작했다 하면 그놈의 원수같은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는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되는 우기철에, 지속적으로 차 오르는 물이 길가의 양 지대로 원활하게 드나들게 함으로써 수분의 지반 침하가 도로의 붕괴로 이어지는 사고에 대비하여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직경 2 m 정도의 알미늄관을 연결시켜 설치한 배수관이 요소요소에 놓여 있었다. 그곳에 머무는 때면 중간에 알미늄관에 부딪쳐 떨어지지 않고 다른 쪽으로 빠져 나오는 돌 던지는 내기를 동료들과 한다던가 따가운 남국의 햇볕을 피해서 그 속에 들어가 상체를 활 모양으로 구부려 잠깐의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11번 배수관이 놓여진 도로가 처음 끊긴 것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이 열린 듯이 많은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을 때였다. OP에서 폭발로 인해 도로에서 상공으로 치솟는 섬광과 폭음을 관측한 것은 새벽 2시 경이었다고 했다. 급파된 정찰대에 의한 보고에 따르면 OP 남서 2km 지점의 도로가 폭 3m 정도로 끊겼으며 다량의 주변에서 수집된 여러 잔해의 흔적을 조사한 결과 TNT를 배수관에 매설해 폭파시킨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끊긴 도로는 일주일 간에 걸쳐 전과 같은 상태로 복구되었고 배수관이 설치된 곳마다 매복대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시실 배수관은 우기철이 4~5개월 계속되는 이곳에서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우기 내내 도로 양 옆으로 항상 물이 차 있었기 때문에 수분이 도로의 지반으로 스며들어 다져진 흙과 자갈을 짓무르게 하였다. 도로를 받치고 있던 흙과 자갈이 옆으로 밀려나자 도로는 곳곳에서 쩍쩍 갈라졌고 샛강 급류가 도로를 가로지르는 곳은 도로의 형체조차 だ?수 없을 만큼 그 피해가 심각했다.

중대 내의 거의 전 병력이 은둔한 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긴급히 중대에 날아든 미군 헬기를 타고 케산 산악 지역으로 빠져나갔을 때였다. 우기가 계속되는 동안 그들의 활동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최소한의 중대 방어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배수관에 나가 있는 매복대는 잠정적으로 작전병력이 되돌아올 때까지 중대로 철수해야 했다. 귀국을 한 달 앞둔 나는 이미 작전 고참이 되어 있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귀국자 보호 차원에서 나는 전 중대병력이 투입되는 이 작전에 참가하지 않고 중대에 잔류하게 되었다.

낮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앉고 무더워 한동안 소강 상태에 머물던 이 지겨운 비님이 또 오시려나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후 늦게 검은 구름이 밀려들면서 폭우가 세차게 내리 쏟았다. 자정이 넘어서야 빗발이 조금씩 잦아지더니 부슬비가 어둠에 뒤엉키어 끈끈하게 내렸다. 그날 밤 OP 관측병이 졸았던지 아님 폭우 때문에 관측에 어려움에 있었던 것인지 중대 본부에선 전혀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지점을 통과하던 정부군으로부터 11번 배수관이 폭파되고 도로가 끊겼다는 무전 연락을 받고 이른 새벽 정찰대가 급파되었다. 내가 속한 3소대에는 나 말고 중대작전에서 열외가 된 병사가 있었는데 전입온 지 불과 2개월도 안된 신병이었다. 전라도 어디 시골에서 농사짓던 청년이었는데 물론 기합이 바짝 든 신병인 탓도 있겠지만 원래 성격도 유순한 것처럼 보였다. 중대 전체에 말라리아 예방 접종이 있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이 친구에게만 부작용이 나타나 접종된 팔 부위가 부어 올라 부득이 이번 작전에 참가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중대에 남은 병력이 얼마 없었기에 이 신병 친구도 정찰대에 합류하여 나서게 되었다. 폭연에 그을은 돌과 알미늄 조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적의 맨발자욱이 간간 눈에 띄었다. 신발을 따로 신지 않는 그들의 발가락은 유난히 길었고 오리발처럼 짝짝 펴져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정찰대가 원형을 이루어 사주경계를 하며 주위 탐색을 계속하는 어느 순간이었다. 갑자기 낙뢰가 인근에 떨어진 듯한 폭발음이 일었다. 대인지뢰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물웅덩이로 몸을 날렸다. 그 신병이었다. 압박붕대로 얼마남지 않은 허벅다리를 묶었지만 피는 좀체 멎지 않았다. 아무리 늦어도 10여분 내에 도착하게 되는 병원헬기를 기다리는 一刻, 一刻이 如三秋였다. 호흡이 점차 느려졌다. 헬기가 도로에 사뿐히 날아와 앉았을 때는 차가운 빗방울만이 굳어진 그의 볼을 타고 무심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벌써 몇 사람의 전우가 대인지뢰에 희생이 되었던가. 경남 합천이 고향이라는 손 상병 하며. 그와 같이 작전에 참여했다가 생사가 엇갈린 손상병의 동기생은 충격으로 붉은 색을 띈 육류를 한동안 먹지 않았다.

같은 벙커에서 한동안 생활을 같이 한 탓인지 어느날 밤 이 신병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꿈속에서 별 다른 말이 없이 생전의 그 모습 그대로 내게 천천히 다가 오는 것이었다. 원래 겁이 많은 나인지라 그런 꿈을 꾸고 난 후로는 전 대원이 작전에 참여하여 혼자 남는 일이 생기는 경우라도 우리 벙커에서는 도저히 혼자 잠을 잘 수가 없어 옆에 벙커로 피신하여 잠을 잔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젊디 젊은 나이에 異國의 戰場에서 散華하였으니 오죽이나 恨이 많으랴 그러니 꿈에 나타나 내게 무슨 하소연을 하고 싶은 것일 게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寃鬼라는 생각을 하면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둥근 알미늄관을 차에서 끌어내려 배수관을 재설치하고 끊어진 도로를 복구하는 美공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 지역에서 우리는 아마도 더 큰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될 거야 하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지만 그냥 속수무책으로 담배를 군에서 배우기 시작한 내겐 아직은 쓰디쓴 Marboro 담배연기 동그라미를 연이어 만들어 허공에 날리는 것만이 명색이 연합군인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을 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중대에서 연이어 읍 쪽으로 위치한 세 개의 배수관을 방어하는 것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첫번째 것은 바로 중대 인근에 있었고 두번째는 도로 양 옆으로 작은 풀만이 자라나는 평평한 초원이 지평선 저 멀리까지 전개되어있어 그들이 숨어들 여지가 거의 거의 없는 것 같았고 급박한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반격대가 단시간 안에 투입될 수 있기에 특별한 경계가 그다지 필요치 않아 보였다. 아무리 외딴 시골이라지만 주민의 왕래가 이따금 눈에 띄는 마을에 거의 붙다시피 한 세번째는 정부군이 맡고 있었다. 남쪽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며 연이어 위치한 세 개의 배수관 중 11번 배수관을 제외하곤 중대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적에게 완전히 노출된 매복은 매복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작전상 매우 불리한 것이지만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도로를 폭파시키려는 그들의 의도가 지난번 폭파로 확연히 드러난 이상 우리는 이곳을 사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야간에 산발적으로 시도되는 포탄 공격은 물론이고 주간에는 인근 바나나 숲속에 잠복해 있다가 살금살금 접근하여 매복대가 사정권 내에 들어오면 그 성능이 우수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쏘련 제 AK 실탄을 날리고 우리 매복대 참호 주위에 유탄을 떨어뜨리곤 번개처럼 사라지는 전형적인 게릴라 전법을 적들은 구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비밀 통로 외에 별다른 길이 있을 리 없는 숲속으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적의 전술에 휘말릴 소지가 다분히 있는 것이어서 보병의 유도에 따라 간단없이 발사되는 아군의 포탄이 숲을 초토화시키지만 효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정부군과 도로의 미군 차량이 그들의 정확한 저격을 받게되면서 주간에 병력이 도로가에 집결해 있는 것이 위험한 상태로 발전하자 그곳에 경계병을 두어 명 정도만 남기고 반대편 숲에 잠적해 있다가 해가 떨어지면 어둠에 묻혀 은밀히 진입하는 방법을 苦肉之策으로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붉은 해가 서산마루에 고무공처럼 걸려 있더니 일부분이 서서히 잠기면서 붉고 푸른 노을 빛이 열대림 위로 길게 뻗쳐갔다. 이맘때쯤이면 무거운 침묵이 우리를 감싸게 되고 서서히 어깨위로 내려 덮이는 침울한 기분에 휩싸여 풀줄기를 뽑아 하얀 밑동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저마다의 생각에 나름대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지난해 어느 날이었는지는 확실히 기억할 순 없지만 그것은 이곳에서 나의 첫 작전 참가였기에 전날 밤 두려움 같은 이런저런 생각에 영 잠이 오지 않아 오래도록 뒤척이던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날이 새기 전 아직 어둑어둑한 숲을 지나 무릎까지 질척하게 빠져 들어오는 늪을 건너서 VC 귀순자를 앞세워 그들의 근거지를 급습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두 명의 경계병을 사살하고 한 명의 베트콩을 생포했지만 총성에 놀라 재빨리 도망친 나머지 동굴에 은거하던 잔당들은 모두 놓치고 말았다. 포로는 팔과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있었다. 위생병이 상처부분을 소독한 뒤에 붕대로 세게 감아 지혈을 시킨 다음 풀 위에 반드시 눕게 했다. 문외한인 내가 얼핏 보아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체구가 건장한 내 나이 또래의 갓 스물이 안되어 보이는 젊은이였는데 검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손을 오므려 입으로 가져가는 시늉을 하며 물을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출혈이 있어 물을 주어서는 상태가 악화된다는 위생병의 말이 있어 나는 그의 시원한 이마와 삼단같은 머리채며 월남인 답지 않게 오똑한 콧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둘러싸고 있는 병사 어느 누구에게서도 그의 타는 듯한 목을 적셔 줄 물 한방울도 얻어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이내 판단했음인지 목을 내려뜨리고 눈을 감은 채 죽은 듯이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펑퍼짐하게 그의 하체를 싸고 있는 명주바지를 더듬어 올라가다 언제 눈을 떴는지 그와 반짝 눈길이 마주쳤다. 그가 빙긋 웃었다. 그리곤 다시 눈을 지긋이 내려 감았다. 아주 짧은 순간인 것 같았다 그가 미소를 머금은 것은. 나는 그의 닫혀진 입술이 좀전처럼 방긋 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검게 탄 그의 얼굴을 그의 얼굴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다물어진 입술은 다시 열리지 않았고 다소 무거운 듯이 보이는 눈까풀을 열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그의 시선엔 특별한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짤막한 미소는 자조적인 것 같기도 했고 뙤약볕 아래 철모를 눌러 쓰고 거기다 무거운 방탄 조끼를 걸친 채 이국의 전장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후에도 이따금 그의 이상스러운 미소를 회상하면서 어떤 의혹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스름이 건너편 수풀 위에 살포시 내려 앉더니 천천히 이편을 다가왔다. 우리는 숲에서 하나 둘씩 빠져나와 최대한 자세를 낮추면서 매복지로 진입했다. 알파 분대가 배수관으로 기어들어 도로 너머로 빠져나갔다. 풀벌레 울음뿐 사위가 적막해서 그들의 몸에 스쳐가는 풀잎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2번 경계 작전 근무였기에 판쵸를 펴고 방탄복을 반 접어 베게 삼아 누웠다. 약을 발랐는데도 모기 두어 마리가 얼굴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 가곤 했다. 포연으로 일그러진 나라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맑게 갠 밤하늘엔 별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늘 듣는 낮은 중얼거림이 옆에서 들려왔다.

"오늘밤 저희에게 평안을 주시옵고 주님의 사랑으로... 아멘."

기도를 마치자 별다른 고민이 있을 리 없는 우리 젊은이들이 다 그렇듯이 고른 숨을 내쉬며 편안히 잠들었다. 어쩌면 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는 신의 손길 아래 포근히 잠들어 고운 꿈길을 거닐고 있을 것이었다. 온종일 대원들과 별달리 하는 일 없이 쓸데없는 잡담으로 하루를 보냈는데도 피로감이 발끝에서부터 나른하게 밀려 올라왔다.

하얀 자작나무와 참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어딘지 눈에 익은 동산이었다. 밤나무꽃 향기가 매케하게 풍겨왔다. 덩굴장미손이 오리나무 둥치를 감아오르며 붉은 꽃을 여기저기 터뜨리고 있었다. 몸뚱이가 샛노란 금빛으로 빛나는 꾀꼬리 떼가 은방울 소리를 내며 여기 저기 후르륵 후르륵 날아다녔다. 비둘기가 멀리서 구구 울었다. 수호천사들이 하느님을 에워싸고 평화로운 이 숲에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생의찬가만이 들려오는 고즈넉한 숲속은 태초의 평화 속에 잠겨있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이 일시에 깨져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웬지 드는 것이어서 풀잎을 밟을세라 오솔길을 살금살금 걸어 나갔다. 무성한 활엽수 잎 사이로 가느다란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산당화 잎 위에서 반짝거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가 아파 길 옆에 비죽이 튀어나온 바위에 걸터앉으려다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그러나 아주 가까이서 들려와 엉거주춤한 채로 재빨리 사위를 돌아보았다. 다람쥐 한 마리가 낙엽송 가지에서 꼬리를 반짝 치켜들고 쪼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계곡 밑으로 달음질쳤다.

"탕!"

총소리가 적막한 숲을 찌르릉 울렸다. 하얀 꽃잎을 가지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고있는 아카시아 나무가지에서 졸고 있던 박새 떼가 화들짝 놀라 후르르 날아올랐다. 저만치 엉겅퀴 풀 위에 잿빛 비둘기 한 마리가 푸드득거리고 있었다. 왼쪽 날개가 날아가고 없었다. 비둘기는 고통스러운지 외짝날개로 작은 몸뚱이를 버리적거렸다. 가엾은 비둘기에게 잔인하게 총격을 가한 자가 몹시 미웠지만 그자가 어디 숨어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피가 흐르는 곳을 붕대로 감은 후 비둘기를 손수건에 싸서 늦기 전에 마을 병원에 빨리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오던 길로 되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 얼마 멀지 않은 자작나무 그늘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갑자기 터져나왔기에 놀란 나머지 비둘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누구야!"

가슴이 콩콩 뛰었다. 대답 대신 기다란 총신이 이제 막 흰 꽃이 피어나는 싸리나무를 비집으며 나왔다.

그 뒤로 흡족한 웃음을 얼굴 가득히 머금은 건장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내 눈동자를 꼭 잡은 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햇볕에 검게 그을은 그의 얼굴은 뜻밖에 어디서 본듯하였지만 누구인지 기억의 저편에서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소꿉친구 동네 애들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장난꾸러기 영구 자식인지도 몰랐다. 그가 바싹 앞으로 다가오자 애써 부드러운 눈길로 다정스레 말을 걸었다.

"얘, 너 나 모르겠니."

"...."

"그럼 그 우물가의 느티나무는 생각나니."

청년은 아니꼽다는 듯이 나를 노려봤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그 가냘픈 비둘기를 쏜 건."

그제서야 그는 이비을 열었다.

"비둘기 같은 건 모조리 죽여버려야 한다고 우리 아버지가 그랬단 말이야. 짜식아."

"너의 아버지가 누군데."

"우리 위대한 아버지를 말하는 거냐?"

"여하튼 너의 아버지말야."

"응."

하고 알겠다는 듯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有産階級을 타도하고 無産大衆의 혁명을 이끄신 위대한 레닌, 스탈린 동무가 우리 아버지지."

자식은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며 자못 으시대는 것 같았다.

"아니 너를 낳아준 아버지 말야, 네게 피와 살을 준."

녀석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떠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식은 겉보기와는 달리 멍청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무 그늘에 드리운 청년의 얼굴은 고혹적인 것이었다.

"너 계집애들이 많이 따르겠구나."

그는 입가에 살픗 떠오른 웃음을 잘끈 깨물면서 성을 발끈 냈다. 그는 재빨리 방아쇠 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넌 왜 날 죽이려고 하지."

"왜냐구?"

그는 경멸에 찬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히죽 웃었다.

"네 놈이 이 숲에 처음 들어설 때부터 나는 쭉 보고 있었지. 난 네놈의 성분을 분석해보려고 일부러 비둘기를 쏘아 떨어뜨린 거야. 그런데 넌 그 비둘기를 살려보려고 네 손수건에 싸가지고 돌아섰지. 네 발밑에 떨어진 비둘기 새끼를 말야."

비둘기는 모로 쓰러져 곧 죽을 것처럼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분명 네 집 지붕에는 비둘기가 우글거리겠지. 그리고 네 집 뜰에는 우리 인민들도 없어 못 먹는 좁쌀이나 콩 따위들이 지 천으로 널려 있겠지.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 동지는 우리에게 언제나 말했거든 비둘기보다도 그것의 둥지를 틀어 주고 모이를 주는 자식들이 더 나쁜 놈들이라구. 우리는 총력을 다해 그런 반동의 무리들을 타도해야만 한다구."

총구는 정확하게 나의 심장을 향해 겨누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지난날 저런 얼빠진 자식들을 만났을 때 혼을 내 주긴 했지만 차마 죽여버리지 못했던 것은 한 줄기 유대의식 때문이었지. 그런데 저 자식은...

난 다급히 외쳤다.

"얘 너와 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니?"

"흥 네 놈들은 아브라함인지 뭔지 하는 얼토당토 않은 것을 느덜 맘대로 지어내 가지고 걸핏하면 우릴 속여먹으려 하지만 내가 넘어갈 줄 알구. 우리에게 역사라는 것은 우리 위대한 스탈린 동지를 위시해 인민투쟁의 역사가 전부라는 것을 잘 알아둬 이 얼간이 같은 자식아."

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 갔다. 때마침 날아가던 참새가 깔린 똥이 그이 팔뚝에 허옇게 떨어졌다.

"에이 더러운 새 새끼들."

그는 총을 왼쪽 손에 옮겨 들더니 뒷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그것을 닦았다. 처음부터 그에 대한 살의라곤 전혀 없었지만 그러나...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윗저고리에서 미 해병 전우 Joe가 떠날 때 선물로 주고 간 revolver(육연발 권총)를 재빠르게 꺼내어 그의 넓은 가슴을 향해 쏘았다. 그는 풀 위에 맥없이 쓰러졌다.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며 다가가 보니 어찌된 일일까 분명히 그 청년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는데 왼쪽 가슴에 여러 발의 실탄이 뚫고 나간 구멍이 군데 군데 나 있는 목각 인형이 풀밭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어찌 된 일일까 청년과 목각인형은?

다리 살이 뻣뻣해지는 것 같아 문득 허벅다리를 만져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던 것이 이미 온기를 잃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심코 팔을 흔들어 보았더니 삐걱 소리를 내며 수직으로 튀어 올랐다. 어디서 치는 지도 모르는 박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새벽 1시 반에 모자라는 잠에 스르르 감기는 눈을 비비며 경계근무 교대를 하였다. 밤 이슬이 알듯 모를 듯 내리고 있었다. 조명탄이 이따금 터지면서 고래등처럼 어둠 속에 드러난 4번 도로를 비추었다. 쥐가 안 잡히는 지 밤 고양이들이 달그락거리며 빈 깡통을 차고 다녔다. 흙덩이를 집어서 반대편 경계를 맡고 있는 전도사를 향해 던졌다. 그가 고개를 돌린 것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둠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우수의 그늘이 넒은 그의 이마 밑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을 것 같았다. 불타오른 그의 첫 순정을 신분 상의 이유로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장군의 딸을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북두칠성의 꼬리가 정남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로 건너 편에서 불꽃이 번쩍 일더니 붉은 파편 조각들이 눈부시게 어둠 속으로 날아올랐다. 실탄이 날카롭게 튀겨지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알파분대를 다급하게 호출하고 있는 선임 분대장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연이어 터지는 폭음과 총성에 뒤섞여 마디 마디가 끊어지면서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공격해오는 병력수도 정확한 주공방향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총성이 이는 방향에다 대강 조준을 하고 경기관총 실탄 한 캔을 단숨에 갈겨버렸다. 예광탄의 붉은 빛이 물줄기처럼 이어지며 저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콩콩 뛰는 가슴의 고동이 숨통을 막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한순간 가벼운 전율이 일며 아쉬운 추억들이 영화의 장면 장면처럼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운 어머님, 내 뛰놀던 고향 마을, 시냇가, 옥이.

실탄을 재장진하려고 LMG 기관총의 윗덮개를 열었을 때 종류를 알 수 없는 포탄이 날아와 가까이 서있는 바나나 나무를 쓰러뜨렸다. 약간의 적 병력이 도로 이편으로 넘어 들어온 것 같았다. 실탄이 질주하는 날카로운 진동음이 머리를 가깝게 스쳐 지나가곤 했다. 정통으로 맞으면 일순간에 두개골이 박살 날 것이었다. 참호 위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수류탄을 더듬어서 그 중의 하나를 집어 뇌관 꼭지에 양 옆으로 오므려 걸려 있는 안전핀의 발끝을 수평으로 폈다. 육박전이 벌어질지 모를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겠다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며 탄띠에 매달려 있는 대검을 슬며시 만져보았다. 전방 500 여 미터 크레모아 앞에 쳐 놓은 조명지뢰가 툭 터지며 환하게 타올랐다. 안전자물쇠가 이미 풀어져 있는 점화기를 재빨리 눌렀다. 후폭풍에 쓸린 모래알 들이 포복해 있는 철모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무수한 조명 낙하산이 밤하늘의 어둠을 지우며 춤추듯이 초원에 내려 앉았을 때 彼我간에 오가던 총성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툭 멎었다. 중대본부와 포병대대에서 쏘아 올린 포탄이 간단없이 날아와 근거리에서 터졌다. 적과 우리는 근접해있었기 때문에 원거리 포 지원사격으로 그들을 궤멸시킬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아군과 적군이 우리 지원부대의 포 사격에 동시에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거리 지원사격은 그들의 후방 지원부대의 진입 차단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중대본부에서 쉬지 않고 쏘아대는 조명탄으로 밤하늘은 마치 불꽃놀이 하는 행복한 밤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퇴로를 아군의 포 사격으로 차단당한 적은 전열을 가다듬어 최후의 공격을 감행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새벽 2시반 이제 한 시간 반 정도면 뿌옇게 날이 밝아 올 것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비상작전 대기 중일 중대 지원병력과 미군 무장헬기(Gunship)가 재빨리 날아와 적을 한 순간에 궤멸시킬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최대한 지연방어를 하며 시간을 벌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위생병이 구급요청이 들어온 알파분대의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참호를 넘어가자 총성이 울렸고 그는 참호 밖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참호 주위에 로켓 포탄이 날아와 터지는 것을 신호로 다시 적의 무차별 난사가 시작되었다. 일제사격을 가하면서 접근하여 끝장을 내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중대에 조명탄 사격 중지 명령을 요청한 선임분대장은 마지막 조명탄이 꺼지는 것을 신호로 참호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배수관을 통과하여 알파분대와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가만히 앉아서 개죽음을 당하지 않겠다는 그의 생각인 것 같았다. 마지막 조명탄이 지면에 떨어져 한동안 불빛을 내다 꺼졌다. 배수관까지의 거리는 40~50 m 가 채 되지 않았지만 참호에서부터 그곳까지는 지면이 튀어 오른 곳이 있어 유탄에 희생될 확률이 높았다. 언제 근접할 대로 근접한 그들의 수류탄이 참호 안으로 날아들지 예측불허의 긴박한 상황에서 지체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중무장을 한채 사력을 다해 목적지로 뛰어갔다. 그리고 빗발치는 탄우 속에서 서로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했다. 진지를 벗어나 배수관 입구에 도달했을 때 참호에 수류탄이 날아들어 폭발하는 섬광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Gunship에서 터뜨리는 항공조명탄들이 먼동이 터오는 새벽하늘에 아름답게 터져 내리며 아직 남아있는 어둠의 입자들을 밀어냈다. 우리 바로 머리 위를 선회하는 Gunship에서의 기총소사음이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다. 아 이젠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서였는지도 몰랐다. 끈질기게 간밤 내내 목덜미를 공격하던 모기떼마저 자취를 감추었고 위장복은 밤새 내린 이슬에 풀잎처럼 촉촉히 젖어 있었다. 멀리 열대의 숲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매드백(병원헬기)이 착륙을 위한 선회를 하고 있었다. 반격대의 첨병이 멀리 도로 위를 걸어오는 것을 어렴풋이 의식하며 갑자기 풀어진 긴장과 함께 구수한 한잔이 블랙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밀려온 얕은 잠 속으로 순간 빠져 들었다.

열대의 태양이 작열하는 4번 도로는 폭염에 바짝 달구어져 콜탈이 군화 뒷축에 묻어났다. 나는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가 심술 가득한 어른에게 놀림을 당한 기분이어서 다리목을 지키는 정부군 소년병이 손을 흔들며 웃음을 보내왔을 때도 예전과 달리 모른 척 하고 입을 꼭 다문 채 뒤로 빠졌다 앞으로 나오곤 하는 군화코를 내려다보며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갔다. 생사를 달리한 전우들이 내 마음 깊숙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었다. 평야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점점 커다랗게 다가오는 중대 OP 가 그 날 따라 열아홉 어린 내 마음에 戱畵的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연유를 알 수 없었다.

 

 Written by Mr. Lee (운영자) (베트남 참전 후 귀국하여 청주대학교 1학년 재학시절에 씀)